《현재전시》1)에 관한 메타 비평: ‘횡단하는 전시와 출판’
/ 김민관
‘전시가 없는 전시’
전시가 있는 출판, 곧 전시를 지시하(기 위해 존재하)는 출판은, 전시가 없는 출판, 곧 전시로 온전히 수렴되는 출판이 될 수 있을까. 전자의 (기존의) 방식이 전시에서 연장되며 전시를 보조하고 전시라는 원본의 재현 가치로부터 멀어지는 출판이라면, 후자의 (도래하는) 방식은 전시의 전후 관계나 우열 관계를 형성하지 않는 출판이다. 《현재전시》는 기존 전시의 과정을 고스란히 답습하며 전시의 대체제로서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작가의 글(작품)들이 있으며, 기획자의 서문과 인터뷰/비평이 그 앞뒤로 자리하며.
이 전시/출판은 전시 공간 안에 놓인 핸드아웃과 전시의 바깥에서 전시 이후에 따르는 도록까지를 결합한다. 여기서 구현되지 않는 건 실제적인 작품, 시각적이고 촉각적인 나아가 청각적인 작업인 듯 보인다. 여기에 전제된 건 이미지와 언어의 오랜 (비자의적) 결속의 관계이다. 사실 전시를 본다는 것은 이미지를 이미지로 치환하는 것의 불가능성(‘이미지를 이미지로 수렴시키는 것의 이상향’)을 논하는 측면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지에서 언어로 나아간다. 우리는 전시를 보고 또 전시를 읽는다. 우리는 발화되는 이미지를 보고(읽을 수 있고) 발화되지 않는 이미지를 읽는다(볼 수 있다)2). 또한 전시를 보고 나서(도) 전시를 읽고 전시를 읽고 나서(야) 전시를 본다. 우리는 작품/전시의 감각/관점이 관람객의 감각/관점과 맞물리는 사건이 전시(의 완성이)라는 전제 아래 있다.
이미지와 언어의 간극에서 보고 읽는 게 전시를 보는 방식이라면3), 그리고 이미지에서 언어로 나아가는 게 가능하다면, 그 반대(언어→이미지) 역시 가능할 것이다. 언어는 이미지를 재현할 수 있는가? 언어로부터 이미지는 분화 가능한가? 결과적으로 전시를 읽는 것만으로 우리는 전시의 체험을 구성할 수 있을까? 이런 물음들은 벤야민의 작품에 대한 ‘번역’이라는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여기서 번역은 원본(전시/작품)을 ‘지금’ 재생한다.4)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현재전시》는 하나의 전시가 아닌, 하나의 전시를 둘러싼 전시의 총체를 구성하려는 의지의 산물이다, 단지 출판으로만. 이는 전시의 보이지 않는 과정을 인터뷰로 드러내고, 전시의 외부로 분리되는 비평을 한 부분으로 구성하는 것으로 나타난다—이 비평(이 책에 실린 「미술 작품을 향한 외부인의 시각」)은 기존 전시에서 작품 읽기에 대한 매개 기능을 하며 전시로 안전하게 삽입되는 데 가깝다(“무엇보다 《현재전시》전은 시간과 장소의 제약이 없는 만큼 많은 사람들이 작품을 감상하며 즐거운 경험을 하길 기대한다.”1 >). 전시에 대한 “지금” “여기”에서 ‘대상과 흡착하려는 글’(“글이 언제나 그 대상과 떨어져 있어서 그것을 제대로 드러낼 수 없다면, 우리는 왜 그런 글쓰기를 계속해야만 하는가?”)2 >에 대한 시도는, 기획자, 비평가를 포함해 작가(들)까지 글을 쓰는 시도로 연장된다. 그리고 이 글(메타 비평)은 비평에 대한 메타 비평에서 나아가 《현재전시》 자체에 대한 비평으로 수렴된다, 비평이 전시-출판으로 수렴되는 것처럼. 그리하여 책 바깥으로 나가며 구성적 외부를 구성한다.
1 > 강지윤, 백진, 안부, 이희인, 임나래, 정두이, 『현재전시 #01』, p.35.; 기획: 강지윤‧임나래, 작업: 강지윤‧이희인‧정두이, 다음 작업: 안 부, 비평: 백 진
2 > Ibid., p.4.
미술과 문학 사이
글 자체가 일종의 소설(픽션)이라면 작업은 그 안에서 캡션으로, 혹은 스크립트로 존재하거나, 묘사로서 존재한다, 각각 강지윤(「년도미상」), 이희인(「내일의 어제, N.」), 정두이(「여름밤」)의 경우에. 여기서 이미지는 언어로 옮겨질 수 있는가, 또는 언어는 이미지의 새로운 출현 가능성을 가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자리 잡는다. 우선 이희인과 정두이는 실재하는 자신의 기존 작업으로부터 출발하는데, 강지윤의 경우, 역시 캡션을 통해 ‘연도 미상’임에도 재료와 표면의 특징을 지정하는 가운데 아마 존재하게 될 것들 그리고 자신의 지난 작업들까지 (아마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이름으로) 명명하며 반영하기에 이른다(“지금껏 자신의 작품 세계에서 주요하게 작동해온 참조물에 의식적으로 집중하고 그것의 역할을 극대화한다.”3 >). 따라서 세 작가 모두 기존 작업을 모티프로 취한다고 할 수 있지만, 단지 자신의 작업들을 글로써 번역하는 데서 나아가 작업에서 연장된 부분을 취함으로써 작업의 위치를 현실 속에서 타진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작업/전시의 외부를 만든다—강지윤의 경우에 작업자를, 이희인의 경우에 일상을, 정두이의 경우에 관람자를 작업에 덧붙인다. 그러니까 작업은 세계 속에서 드러나야 한다. 다시 말해 작업은 세계와의 연관 속에 있다.
강지윤 작가는 작업(작품)을 만드는 작업자(작가)를 재현함으로써 작업자의 자의식에 다다른다(“그는 그가 만들어낸 것들이 어디로 가는지, 어떤 쓸모로 쓰이는지 알 수 없었을 뿐더러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쌓아내는 형태에 대해서라면, 그 누구도 특정 형태를 지시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 수 있었다.”4 >). 이희인의 경우, N 주변의 일상과 N에게 보이는 TV 속 이미지를 그리는 데서 출발해 < 보다 >(2016)를 N의 작업물로서 N의 삶 중간 중간 삽입하는데, 일상은 마치 영상처럼 편집되어 간다. 일상은 생략되거나 재생된다(“N은 영상을 몇 번 되돌려 보았다. 그는 그가 편집한 시간들 … 그리고 밀려있는, 산적한 시간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스킵. N은 어려운 시간, 나열하기 힘든 시간, 아직 잘 모르는 순간을 지나쳤다. … 하지만 다시 내일. 어제의 지나친 시간을 꺼내어 보고 후회했다.”5 >). 정두이의 경우, < Read Me >(2016)가 놓인 전시장의 묘사로부터 나아가 세계(로서 전시)로 확장을 꾀한다(“전시장에 비치된 안내문에 따르면, 거대한 여름밤 안에는 총 12개의 통로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벽 안쪽으로 이어져 있다고 했다.”6 >).
강지윤의 경우, 작업자로부터 출현하는 작업, 또는 작업이 유래하는 작업자로 거스르며 작가와 작업의 사이를 지운다면(여기서 시간뿐만 아니라 현실 자체도 미상이 된다), 이희인의 경우, 일상과 세상에 대한 묘사와 함께 작업과 현실을 두 개의 레이어로 구성함으로써 작업이 현실에서 위치하는 바를 가늠하게 한다. 정두이의 경우, 전시와 세계의 느슨한 결속으로부터 세계가 곧 작업이 되는 지점을 보여준다. 이희인과 강지윤의 경우, 작가와 작업은 분리되지만 하나의 세계 속에 있다면, 정두이의 경우, 새로이 생성되는 세계에서 “나”의 세계 체험이 곧 전시가 된다. 결과적으로 앞선 두 글이 작업을 차용 또는 인용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면 후자에서 글은 전시를 완전하게 완성시킨다, 미술은 소설로 완전히 흡수된다(“처음에 들어왔던 전시장의 입구가 어디였을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길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다.”7 >).
이 세 작가의 글은 매체의 전환을 꾀함으로써 새로운 장르, 곧 문학에 맞서며 새로운 장르로서 위상을 맞는다. 글의 모티브 혹은 창작의 참조물로부터 어떻게 그것을 문학으로 붙들고 문학으로 수렴시킬 수 있을지는 작업의 새로운 과제가 된다, 전시가 아닌 문학으로서의 과제―물론 작가가 문학의 관습을 체현/재현해야 할 의무는 없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미술과 문학의 경계를 초과하는 두 장르 사이의 어떤 횡단에 가깝다. 앞서 봤듯 「년도미상」이 캡션으로, 「내일의 어제, N.」이 스크립트로, 「여름밤」이 묘사로 작업을 제시하는 부분으로 나아가는 가운데, 흥미롭게 책의 순서와 맞물려 변화의 지점들을 살펴볼 수 있다. 「년도미상」의 캡션은 투박하게 작업이 대상으로 놓이는 부분이라면, 그리고 「내일의 어제, N.」의 스크립트는 일상의 영향이 직접적이지 않게 반영되어 있고 일상을 보는 방식에 영향을 끼치고 있어 결과적으로 일상의 레이어와 뒤섞이려 한다면, 「여름밤」의 묘사는 작업과 작업을 보는/겪는 체험이 결부되어 있어 더 이상 작업이 세계와 구분되지 않는 지점을 만든다. 이는 다시 말해 미술이 문학 그 자체가 되는, 문학의 참조물로서 미술을 더 이상 거론하지 않아도 되는 부분이다(이는 전시의 외부―전시로 환원되지 않는―이기도 하다).
3 > Ibid., p.4.
4 > Ibid., p.8.
5 > Ibid., pp.4~5.
6 > Ibid., p.20.
7 > Ibid., p.22.
전시와 출판의 무한궤도
대부분의 전시 이후 출판이 전시의 부고를 알리는 그 자체로는 불완전한 지시체, 다시 말해 전시 자체를 새롭게 구성하기보다는 전시의 죽음과 전시의 연장 사이의 단순한 연결고리(‘재현적 기억’)로서 기능하려 한다면, 이 전시-출판은 출판 이후에야 비로소 시작되는 전시를 의도한다, 물리적으로 책을 펼치는 순간 또는 책을 다시 덮는 순간. 보통 출판이 전시의 또 다른 시작점을 만들지 않는 것처럼, 이 다른 출판은 전시의 시작이 될 수 있을까. 또는 전시를 그 자체로 완성할 수 있는 것일까5).
《현재전시》는 결과적으로 소모되고 흩어지는 텍스트(“너무 이르거나 늦게, 그리고 전시와는 무관한 장소에 존재”8 >하는 글) 속의 전시(의 제도적 문법)를 탐문하고(“그러나 작품 이전과 이후에서 전시의 내용을 채우는 것들에 대한 실험은 여전히 미진합니다.”) 전시의 번역 가능성을 논하며(“말과 글만으로 작업이 가능한지 혹은 전시가 가능한지를 실험”9 >), 전시의 진정한 외부로서 출판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여기서 전시의 번역 가능성은 작가의 매체적 전환에 대한 욕망보다는 매체적 전환을 통한 비평의 이상향을 향한 시험과 그에 대한 욕망의 견지에서 생각될 수 있다. 애초에 이 전시-출판은 텍스트(만)를 주 매체로 사용하는 작가의 작업으로만 구성되지는 않았으며, 그렇지 않았었던 작가에게는 (번역의) 새로운 과제/실천이 부여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현재전시》는 출판이 전시를 대체한다기보다는 전시의 전후를 구조적으로 구성하고 ‘다음’을 기약함으로써 곧 전시와 출판의 순서를 도치함으로써, 출판으로 전시를 온전히 옮길 수 있느냐의 부분에서 나아가 출판으로 전시를 재출현시킬 수 있느냐의 부분까지를 이야기하게 된다. 따라서 전시에 대한 출판의 번역 (불)가능성에 수렴되지 않고, 출판에 대한 전시의 번역 (불)가능성 역시 타진된다. 작가들의 작업은 글로 번역되어(서야) 책에 삽입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작업이 글보다 선행함을 또한 작업이 글과 분리되어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이 출판이 전시의 외부를 가정하듯(“작품을 발표하는 방식은 더 이상 실내 전시장에서 벌어지는 보여주기에 국한되지 않습니다.”10 >) 이 전시는 출판의 외부를 상정한다, 다음 전시로써 그리고 메타 비평으로써. 이렇게 전시와 출판의 위상을 재고하며 구조를 쌓아가는 과정은, 전시/출판의 다른 층위들, 끝없이 릴레이 되는 전시-출판의 연속선상을 만들어 간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이러한 과제를 남긴다. 대부분의 전시는 일정 시간 동안 무료로 개방된다. 반면 이 전시는 책이 수중에 있는 동안 언제나 그러나 유료로 포획되어야 한다. 출판은 한편으로는 다른 출판물들과 함께 전시되며, 펼쳐지지 않고 닫힌 채 어쩌면 반쯤 열린 채 바깥에서 머문다. 전시는 자신의 내부를 온전히 허락한다, 관람객이 공간을 찾는다면. 그러나 이는 출판에 있어서는 매번 적극적인 펼침의 방식을 거쳐야 가능하다(이 전시-출판은 여러 페이지의 펼침으로 구성된 병풍과 같은 전시 인터페이스 방식으로 구현되지 않았다). 출판은 독자의 공간에 있지만, 독자에게 자신의 내부를 곧장 허락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방식에서 《현재전시》는 얼마만큼의 1차 체험자를 전제할 수 있을까. 그리고 출판으로 연장되는 소수의 2차 체험자를 생산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이 출판은 어떻게 유통될 수 있고 다시 재매개될 수 있을 것인가6).
마지막으로 한 가지 간과된 것이 있다. 이 출판의 표지는 이미지가 되기를 거역한다. 자족적이거나 자의적인 이미지로 자리하는 대신, 일종의 책의 본문으로 자리하며7), 이 출판이 전시임을, 곧바로 펼쳐져 있는 전시임을, 이미 내가 이 안에 들어와 있음을 알리는 전시가 된다. 단순하게 이 전시/출판은 스크립트 자체로 전시장에 다시 놓일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출판-전시는 거꾸로 다시 전시로 만들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미지에 대한 언어의 온전한 재현보다는 언어가 가진 이미지에 대한 충만한 가능성의 측면에서? 또는 또 다른 이미지-언어로서 그 가능성을 체현하며? 이 전시-출판은 다시 출판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출판의 해체와 재조합을 통해서? 또는 끝없이 불어나는 메타-메타-메타…비평을 더해 가면서?8)
8 > Ibid., p.4.
9 > Ibid., p.?; ‘미주 7’을 참고할 것.
10 > Ibid., p.?; ‘미주 7’을 참고할 것.
1)
사실 이 글은 『현재전시 #01』에 대한 (메타) 비평으로, 『현재전시 #01』는 책 안에서 《현재전시》로 지칭되는데, 이는 이 출판이 한편으로 ‘미래의 현재’를 가정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 전시를 출판으로 대체하고 이를 전시 읽기로 전유하는 방식이 이 출판의 고유한 하나의 방식이자 실험이며 향후 지속되는 하나의 틀로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아마도 전시의 해체를 통해 출판을 해체하(려)는 이 출판의 의도 아래, 이후 이 출판(『현재전시 #01』)을 그리고 이 출판의 개념까지를 《현재전시》로 명명하기로 한다―따라서 이 글은 사실 《현재전시》에 대한 (메타) 비평이다. 이 표면상의 출판, 《현재전시》는 스스로 전시임을 가장/가정한다. 이는 전시이기도 하고 출판이기도 하며(‘전시/출판’), 또 전시와 출판 사이의 간극을 시험하며 전시와 출판을 접합한다(‘전시-출판’). 나아가 출판으로부터 새로운 전시의 가능성을 다시 끌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출판-전시’). 이후 《현재전시》는 ‘전시/출판’에서 ‘전시-출판’으로, 다시 ‘출판-전시’로 계속해서 그 명명을 달리하게 될 것이다. 물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는 결과적으로 출판의 형식을 띠고 있으며, 이 안에 들은 개별 글들은 작업이 아닌 글로서 규정했다, ‘「」’ 표시를 통해서. 세 명의 시각예술 작가의 작업이 곧 글로 치환되는 과정의 위상에서 그 작업-글들을 검토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이 작업-글에 대한 각주들은 책을 대하는 글의 문법을 체현한다. 거꾸로 그러한 글의 문법을 체현하기 위해서 이 작업-글들 역시 글로서 지정하고자 했다.
2)
랑시에르는 이미지의 직접적 현전의 가능성을 괄호 치고, 이미지와 그것의 전달에 간극을 삽입함으로써 이미지의 유동적 해석 가능성을 제시한다. “새로운 체제, 즉 19세기에 구성된 예술의 미학적 체제에서 이미지는 더 이상 어떤 사유나 감정의 코드화된 표현이 아니다. 이미지는 더 이상 복사본double이나 번역이 아니다. 이미지는 사물 자체가 말하고 침묵하는 방식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미지는 무언의 말[하기]로서 사물의 한복판에 거주한다.”(자크 랑시에르, 『이미지의 운명』, 김상운 옮김, 현실문화, 2014, p.30.) 영화의 몽타주를 가지고 예를 드는 랑시에르의 ‘문장-이미지’라는 개념은, 텍스트와 이미지의 선후 관계를 뒤엎고, 그 둘의 연쇄 관계를 만든다. “문장은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이미지는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문장-이미지라는 용어로 내가 의도하는 것은 미학적으로 정의되어야 하는 두 기능들, 즉 텍스트와 이미지 사이의 재현적 관계를 깨뜨리는 방식에 의해 정의되어야 하는 두 기능들의 결합이다. 재현의 도식에서 텍스트의 몫은 행위들의 이념적 연쇄의 몫이며, 이미지의 몫은 텍스트에 살[육신]과 일관성consistance을 부여하는 현전의 보충이었다. [그러나] 문장-이미지는 이 논리를 뒤엎는다.”(Ibid., p.86.)
3)
여기서 ‘간극’은 이미지와 언어의 ‘분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지와 언어의 어떤 친밀한 접합에 가까울 것이다. “만일 사물이 보이는 사물과 말해지는 사물로 분리되어 있다면, 말은 그 분리를 없애는 데에, 그것을 보다 뿌리 깊은 것으로 만드는 데에, 그것이 말하도록 그대로 내버려 두는 데에, 그것 속에서 사라져 가는 데에 착수한다. 그러나 말이 작동해서 만들어 내는 그 분리는 여전히 말 속에서의 분리일 뿐이다. 아니면, 그 분리로 인해, 말이, 이미 그 분리 속에 들어가 있는 하나의 말을 통해 말하는 말이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현전의 단순성, 현전 가운데에서의 보이는 것과 말하여지는 것의 단순성 자체인 단순성으로 인해. / 현전은 다만 분리 속에 있지 않다. 현전은 분리 한가운데로 또 다시 도래하는 바로 그것이다.”(모리스 블랑쇼, 『기다림 망각』, 박준상 옮김, 그린비, 2009, p.122.)
4)
작품과 번역은 벤야민의 사상에서 유비가 아닌, 근친적(verwandt) 관계를 이룬다. “번역은 하나의 형식이다. 번역을 그 자체로서 파악하려면 원작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원작 속에 그 번역의 법칙이 그 원작의 번역 가능성(Übersetzbarkeit)을 통해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발터 벤야민, 「번역자의 과제」,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 번역자의 과제 외』, 최성만 옮김, 도서출판 길, 2008, p122.), 번역은 원작으로부터 원작과의 친연적 관계를 만드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삶의 언표들이 살아 있는 자에게 무언가를 의미함 없이 그 살아 있는 자와 내밀하게 연관되는 것처럼 번역은 원작에서 나온다. 그것도 원작의 삶에서라기보다 원작의 ‘사후의 삶’(Überleben)에서 나온다.”(Ibid., p.124.)
5)
가령 우리는 ‘책으로서의 인터페이스를 대입하는 전시’를 생각해볼 수 있다. 정가영 국립현대미술관 큐레이터의 전시에 대한 그의 독특한 시뮬레이션 감각, 잡지의 레이아웃 속 텍스트-이미지의 배치를 가정하고 전시를 구성하고 이후 다시 출판으로 이를 구현하는 과정을 그 예로 들 수 있겠다. 국립현대미술관(2017.12.12.)에서 열린 ‘큐레토리얼 실천과 출판’이라는 자리에서 패널로 참여한, 정가영의 경우, 전시보다 잡지를 만드는 경험이 선행되었는데, 이후 그가 참여한 전시에 대한 경험에서 건축 잡지에서의 이미지와 텍스트의 배치가 어떻게 전시 공간에서의 배치에 대한 관점과 맞물리는지, 나아가 전시의 배치가 어떻게 잡지의 레이아웃과 차별화되는지(‘도면으로 들어오지 않는 전시’)를 살펴볼 수 있었다. 거꾸로 ‘전시로서의 인터페이스를 대입하는 책’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이는 증강현실로 연장되는 책이라는 근래의 책의 즉자적인 공간 구현의 방식보다는 구체시와 같은 책의 페이지에서 아이디어를 감지할 수 있는데, 더 전통적인 방식으로는 병풍 혹은 두루마기 그림 등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전시》는 기존 전시의 대체제로서 존재하고자 하는 것처럼, 또한 기존 출판의 대체재로서 존재하고자 한다. 이로써 전시의 외부와 출판의 외부가 맞물리는 지점을 상정하고자 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후 본문에서 더 이야기된다.
6)
웹 환경 내에서 글쓰기는 대안적 지침을 준다. “…디지털 텍스트는 텍스트의 개별적 독서와 디지털화된 거대한 망들 속에서 하이퍼텍스트를 통하여 팽창된다. … 음성 언어, 문자 언어, 이미지를 혼합시키는 하이퍼텍스트는 선형적 텍스트와 대립되는 것으로, 망으로서 구조화된 텍스트이다. 하이퍼텍스트는 다발의 망들과 이 같은 망들 사이의 관계―참조, 주석, 지시소, 버튼 등―로 이루어진다.”(김성도, 『디지털 언어와 인문학의 변형』, 경성대학교 출판부, 2003, p.71) 하지만 《현재전시》는 앞서 언급했듯 전시의 대체재로서 기존 전시와 유비 관계를 이루며, 전시의 물리적이고 (시)공간적인 측면을 상정하고 있다.
7)
표지의 “《현재전시》는 동시대 시각예술의 지면 플랫폼입니다.…”로 시작하는 「자세히 보기(information)」는, 따라서 본문에 위치하는 하나의 글로서, 다만 페이지를 명기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념적으로) 오류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곧 책의 페이지가 아닌 책의 이미지라는 것을 고수한다는 점에서. 다른 한편, 표지 좌측 상단에 있는 창의 축소‧확대‧소멸의 나란히 위치한 세 아이콘은, 이 출판이 현재 웹으로 연동되지는 않지만, (향후) 하이퍼링크적 접속의 역량을 가지는 것을 의도한다고도 보인다. 이를 웹상에서 본격적으로 일종의 본문이 전개되기 전에 뜨는 공지 성격의 팝업창을 의미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이 표지를 하나의 이미지로 볼 수 있는 당위가 주어진다고 하겠다―그것은 별도의 창으로서 본문의 페이지를 이루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꺼야/지나쳐야 본문에 이르게 된다.
8)
결과적으로, 이미지/글, 미술/문학, 전시/출판의 세 개념 쌍을 낳고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현재전시》는, 전자에서 후자로의 변환 과정이 아닌, 후자로부터 전자의 개념을 재고하게 하는 실험을 직접적으로 수행한다는 점에서, 그 활동의 지속 가능성 이전에 예술(계)에 질문을 던지는 측면에서 의미를 달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