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를 하려면, 전시에서 보일 작품이 필요하다. 전시와 작품이 필요충분조건에 있는가 싶지만, 정작 전방위로 출몰하며 전시를 전시답게 완성하는 것은 글인 듯 보인다. 아이디어 단계의 메모, 제작 중의 작가 노트, 공모 지원서, 전시 기획서, 보도자료, 전시 서문, 인터뷰, 리뷰, 비평, 메타 비평 등. 공표되지 않는 조각 글까지 포함한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글이 작품과 그리고 전시와 묶이는지 헤아릴 수 없다. 무수한 글이 작품을 증명하고 전시를 보증하려 한다.
관객 대부분은 전시에 대한 글을 작품보다 먼저 만난다. 홍보 글을 보고 기대하던 전시를 놓쳐도 크게 아쉬울 것이 없다. 작품 사진이나 전시 전경이라는 캡션을 단 이미지 서너 장, 그리고 이미지에 담기지 못한 나머지를 설명하고 보충하는 글이 전시 종료 후에 따라붙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쓴이가 아무리 노력해도, 전시 전후에 있는 온갖 글은 실제 전시와는 다른 시간에, 너무 이르거나 늦게, 그리고 전시와는 무관한 장소에 존재한다. 글이 언제나 그 대상과 떨어져 있어서 그것을 제대로 드러낼 수 없다면, 우리는 왜 그런 글쓰기를 계속해야만 하는가?
《현재전시》는 이러한 고민을 토대로 작품-전시-글의 위상을 전환한다. 전시에 참여하는 작가는 말과 글만으로 작품을 완성한다. 특히 첫 번째 《현재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각자가 작업하면서 주요하게 참조하는 그 무엇을 작품 전면에 드러내고자 했다. 지금껏 자신의 작품 세계에서 주요하게 작동해온 참조물에 의식적으로 집중하고 그것의 역할을 극대화한다. 이로써 배경에 머물러 있던 유무형의 참조물이 작품의 완결로 이르는 문자의 길을 앞서 터준다. 그리고 종이 위 2차원 공간에서 발표된 작품과 함께 과정 또한 흔적을 남긴다. 서문으로 시작해 세 편의 작품과 비평, 인터뷰에 이르러 완성되는 낱권의 책은 그것대로 작품이면서 동시에 한 건의 전시이다. 관객이 실체는 없으나 분명히 존재하는 작품을 읽는 동시에 볼 때 작품-전시-글이 완성되어 간다.
이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물리적 제약에서 벗어나 말과 글로 각기 다른 작품을 짓는다. 강지윤은 언어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공간, 관계, 구조의 균형과 경계를 실험해왔다. 이 전시에서 작가는 〈년도미상〉(2017)이라는 제목처럼 시간도 공간도 특정할 수 없는 막연한 공간에서 “평범하고 무료한 것들”을 쌓아 올리는 그의 일을 다룬다. 그는 목적은 없지만 반듯하고 평범한 것들을 선택하여 어떤 형상들을 완성한다는 목표를 착실히 수행해나간다. 쌓여가는 것들 앞에서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움직이는 그는 흡사 작가를 닮았다.
이희인의 〈내일의 어제, N.〉(2017)은 작가의 전작 〈보다〉(2016)에서 출발한다. 〈보다〉는 급변하는 한국의 지금을 사는 인물 보다의 삶을 통해 사회와 개인이 맞닿는 지점, 그리고 거기에서 발생하는 강요와 훼절을 보여주는 영상이다. 〈내일의 어제, N.〉의 주인공 N은 이미 완성된 이 〈보다〉를 재편집한다. 오늘이 어디쯤에 있는지 모를 시간 속에서 N은 끝나지 않을 작업을 반복한다. 스크립트를 통해 말하는 보다, 모니터 속 보다를 바라보는 N, 그리고 N을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이 겹치며 서로의 세계가 엉키고 중첩된다.
정두이는 지금이라는 순간의 가능성에 주목하고, 반대항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에 환영의 방식으로 접근해 이항대립의 관계를 허무는 작업을 해왔다. 이번 신작에서 작가는 지난 개인전에서 선보인 글이 놓인 공간 설치작 〈Read Me〉(2016)를 거쳐 〈여름밤〉(2017)으로 들어가는 나의 이야기를 전한다. 작가의 실제 경험과 꿈, 머릿속에 떠다니던 공간 설치 작업이 결합하여 생성된 여름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전시장을 구축한다. 관객은 나의 걸음을 따르면서 신비로운 소리와 빛이 유유히 흐르는 에피소드를 경험하게 된다.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하는 세 작가의 작품은 관객이 《현재전시》를 펼칠 때마다 새롭게 전개되고 완성된다. 그렇게 작품과 전시는 영원히 현재에 머무르며 자신을 갱신한다.
그가 오랜 시간 공들여 쌓아올린 것들은 평범하고 무료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불우하거나 우울한 느낌을 주지는 않았다.
그가 하는 일은 누군가 살던 곳에서 떨어져 나온 자재들 중 쓸 만한 것들을 골라내는 것이었다. 요즘에는 늘 사람들이 이사를 다녔으므로 일거리는 끊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이년이나 사년 쯤 살다가 짐을 꾸려 다른 도시로 이동했다. 그는 그들이 살던 곳에서 떨어져 나온 대리석이 프린트 된 장판이나 기하학적 패턴의 모노륨, 바람이 불면 파리 날갯짓 같은 소리를 내며 떨렸을 블라인드와 수평이 맞지 않아 끄덕끄덕 흔들리는 테이블 같은 것들 사이에서 원하는 부분을 골라 일정한 모양으로 재단했다. 어떤 때는 그가 예전에 살던 곳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들이 나올 때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 사는 곳이 다 비슷비슷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것이 그가 예전에 살던 곳이라고 해도 이제는 그가 사는 곳이 아니라는 점은 확실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는 쌓아올릴 무언가를 선택할 때 수많은 것들 사이에서 곰곰이 오랜 시간 생각해 보고 최선이라고 판단되는 것을 골랐다. 어떤 날은 어쩔 수 없이 급하게 손에 잡히는 대로 건져 올릴 때도 있지만, 그래도 여건이 된다면 늘 처음 대하는 선택인 것처럼 신중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기준은 그것이 이전의 선택과 얼마나 닮아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한 번 시작되면 쉬운 일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는 더더욱 신중해지려고 애썼다. 그가 만든 모양은 평범했지만 다른 사람이었다면 절대 같은 모양으로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가 아예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만든다면 전혀 다른 형태가 될 수도 있었다.
그가 선택한 것들은 주로 반듯한 것들이었다. 무료하다고 표현한 것은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비정형의 입체감이 있는 것은 의식적으로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늘 반듯한 것들을 삶의 장소로 들여 놓으려고 애쓰기 때문에, 그리 고단하지 않았다. 화려한 장식이 있거나 겹쳐 쌓을 수 없을 정도로 규격을 벗어난 물건들은 다른 도시로 떠날 때 꽤나 골칫거리가 된다. 일톤 트럭, 혹은 이점오톤 트럭에 한 사람이 살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을 욱여넣다 보면 울퉁불퉁하게 특별한 것들은 최초의 선택에서부터 배제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생활고生活苦의 취향이 만들어지고 난 후 주변을 둘러보면 마침내 편평하고 반듯한 것들만 남게 된다. 그가 살고 있는 곳의 풍경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는 말하자면 성실한 노동자였다. 그는 그가 만들어낸 것들이 어디로 가는지, 어떤 쓸모로 쓰이는지 알 수 없었을 뿐더러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쌓아내는 형태에 대해서라면, 그 누구도 특정 형태를 지시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 수 있었다. 어떤 색깔과 질감을 고르는지는 상관없었다. 그는 대부분의 신경을 어떻게 하면 반듯하고 단정하게, 그리고 효율적으로 겹치거나 쌓아낼 수 있을지에 쏟아내고 있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는 그렇기 때문에 이곳에서 일할 수 있었다.
그가 일을 시작한 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점차 몇몇의 형상들이 그의 주변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쌓아올려져 벽과 같은 형태이거나 기둥, 아주 기초단계일 때는 바닥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가 만들어낸 것들은 다음과 같다.
- 벽의 형태로 쌓아올린 표준 규격(230*114*66)의 덩어리들, 가변크기, 년도미상
- 바닥에 놓인 기하학적 패턴이 새겨진 편평하고 납작한 것, 1220*2440, 년도미상
- 다수의 가구다리를 이어붙인 길쭉한 것, 천장높이만큼, 년도미상
- 허공에 겹쳐 매달린 투명하거나 반투명한 편평하고 납작한 것들, 각자 사이즈는 다르지만 대략 1000*2000 이내, 년도미상
그가 만들어낸 것은 한눈에 보기에도 단정했다. 그것들은 마치 지층과 같이 주어진 시간을 성실하게 밟아가며 축적되거나 성장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라면 그것이 슬며시 기울어져 있다는 점 뿐 이었다.
그는 문득, 온통 편평한 것들로만 쌓아올렸는데도 이렇게 기운다는 사실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 이상으로 깊이 고민하지는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신경 써서 모서리를 잘 맞추는 일 뿐이었다. 편평한 것들의 모서리를 맞췄는데도 이것이 기울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쩌면 내 눈이 무언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어,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나았다. 그러나 형상이 갖추어져 가면서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은 도무지 의심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 기울어진 벽의 형태로 쌓아올린 기울어진 표준 규격(230*114*66)의 덩어리들, 가변크기, 년도미상
- 미세한 기울기로 바닥에 놓인 기하학적 패턴이 새겨진 편평하고 납작한 것, 1220*2440, 년도미상
- 비틀린 채 서로간의 균형으로 버티고 있는 다수의 가구다리를 이어붙인 길쭉한 것, 천장높이 만큼, 년도미상
- 나란하지 않게 허공에 겹쳐 매달린 투명하거나 반투명한 편평하고 납작한 것들, 각자 사이즈는 다르지만 대략 1000*2000 이내, 년도미상
그는 때때로 멈춰 서서 어디가 잘못됐는지 들여다보기는 했지만 그저 다음 재료를 더하는 것 외에 딱히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없었다.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슬쩍 다른 작업자들을 보아도 그들이 만들어내는 것 역시 크든 작든 얼마간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는 안심할 수 있었다. 아마 다른 작업자들도 그의 것을 보고 안심했으리라.
어떤 것들은 벽이나 천장까지 닿도록 자라났다. 어떤 것들은 다른 것들과 맞닿기도 했는데, 그럴 때에는 각자의 기울기와 무게가 서로에게 지지가 되었다. 신기하게도 잔뜩 기울어진 것조차 균형을 잃고 넘어지는 일은 없었을 뿐더러 어느 누구도 그것이 마침내 무너질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내재된 불안감은 상습적인 것이라서 드러나질 않았다. 작업자들은 평온하고 규칙적으로 일을 했다. 같은 시간에 출근해서 같은 시간에 밥을 먹고 같은 시간에 각자의 장소로 돌아갔다. 생각해보면 그는 늘 평이하게 살기 위해서 노력해왔다. 어쩌면 그들의 믿음, 그들 스스로 평범하다는 믿음이 그들이 만들어낸 것들을 지탱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사실 대부분의 것들이 그런 상태로 유지된다.
N은 눈을 떴다. 그리고 다시 감는다. 오늘이 언제인지 잊었다. 오늘이 어디쯤인지 말이다. 이것은 아무래도 오래된 기억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 기억은 되풀이되고 있다.
온통 하얗게. 벽지 위에 흰 페인트가 칠해진 집 안, 그리고 그 속에 어떤 규칙으로 자리잡은 조립식의 하얀 가구들. 그것들과 묘하게 배치된 포인트가 되는 색상의 철제 캐비넷, 분명 자라난 화원보다 멀리서 왔을 식물들은 붉은 토기에서 초록을 담고 있었다. 주변의 무채색은 식물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는 N. 반복되는 오전 10시의 N의 집의 풍경이다. 그리고 온통 하얀 집 안에서 돋보이는 식물과 함께 N역시 식물 같은 존재로 그 풍경 속에 있다.
다 읽었을 지 의문인 책들, 가장 기본적 구성이지만 어쨌든 구색을 갖춘 오디오 시스템, 최근에 구입한 70년대 바이닐들, 그리고 카세트 테이프들, 스피커에선 스트리밍으로 재생되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럼, 보드카의 빈 병들, 흰 벽에 드문드문 붙은, 독특한 디자인의 포스터, 무언가를 찍은 지 모르겠지만 빈티지한 색감은 작은 사이즈의 사진들, 모카포트에선 커피가 추출되고 있었다. 정오의 N의 집의 풍경이다. 그리고 정오의 풍경은 N의 주기로 다른 모습이다. 흘러나오는 노래가 바뀌거나, 커피 원두의 종류, 누렇게 바래져 가는 흰 벽, 모카포트가 아닌 드립 중인 N. 아니 이건 어제의 풍경이다. 어제를 마지막으로 커피가 떨어진 N은 얼마전 친구에게 받은 허브티백을 뜨거운 물에 우리고 있다.
Mort Garson의 “Mother Earth’s Plantasia” 앨범을 유튜브를 통해 재생한다. 며칠 전부터 N이 냉동시킨 빵을 데우고, 마실거리를 준비하는 동안 듣는 음악이다. Plantasia-Symphony For A Spider Plant-Baby’s Tears Blues-Ode To An African Violet-이쯤이면 그의 늦은 아침식사 준비가 끝난다. 커피를 한 모금, 아니 오늘은 허브차를. 주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N은 티비를 켠다. 어젯밤에 봤던 채널에는 어젯밤에 봤던 프로그램의 재방송이 다시 나오고 있다. 채널을 돌린다. 물건을 판매하는 방송이 나오고 있다. 홈쇼핑, 그 프로의 한 여성은 제습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물에 젖은 수건을 제습기에 올리자 수건은 하나, 둘, 셋, 넷, 다아섯, 여섯, 일곱, 열에 말랐다. 그리고 그것을 오늘 사는 것이 얼마나 좋은 조건인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오늘도 화려한 말솜씨다. 그녀는 순식간에 많은 사람들이 평생 만져보지도 못할 만큼의 금액을 단 십 분만에 벌어들였다. 그녀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친 사람에게 위로를 전했다. 그리고 다음 상품.
사실 N은 홈쇼핑을 통해 물건을 사는 것에 딱히 관심이 없다. 컴퓨터가 없던 시절 24개월 할부로 컴퓨터를 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군대에 간 N은 전역하고 집으로 돌아온 후 구닥다리 컴퓨터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게 N의 홈쇼핑에서의 유일한 구매인다. 그때부터 물건에 값을 지불할 때까지만 그 물건에 관심이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N의 컴퓨터는 24개월을 외롭게 살았지만.
이제 더 이상 물건의 판매자들은 머리를 조아리지 않았다. 사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사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그저 사고 싶던 것들을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는 것에 대해 감사했고,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물건을 저렴하게 구입하는 것은 자랑이 되었다. N은 그러한 소비문화에 대한 일종의 반감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것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이며 합리적 소비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N은 다시 식물과 같은 존재로 돌아간다.
N은 며칠 전부터 그의 컴퓨터 앞에서 고민을 하고 있었다. 물론 이전과는 다른 컴퓨터이다. 그의 24개월간 방치된 컴퓨터 이후로 세 번째 컴퓨터이다. 지금의 컴퓨터 이전의 컴퓨터는 랩탑이었는데, 한 번의 메인보드 교체와 두 번의 배터리 교체, 한 번의 전원 어댑터 구입이 있은 후 차츰 책상에서 침대로 침대에서 책장으로 이동했다. N은 오늘도 작업의 진도가 나가지 않는 모양새이다. 그는 프린트한 스크립트와 모니터를 번갈아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담배를 피고. 오후 4시 N의 집의 풍경이다. 그 일련의 행위를 되풀이하다가 가끔 모니터를 보다가 스크립트에 연필로 메모를 끄적이기도 했다. 그리고 베란다 창문 밖으로 담배 연기를 뿜었다. 다시.
나무 새소리 나무 새소리
(블랙)_새소리가 들린다. 가볍고 시끄러운 새의 소리가 계속되며 새소리의 근원인 버드나무가 보인다. (새들이 있음직한 버드나무가 보인다.) 카메라 패닝. 또는 줌인.
N은 스크립트를 소리 내어 읽었다. 그리고 모니터를 보며 스페이스바를 누른다. 오후 5시 N의 집의 풍경이다. 이 모습은 일주일 째 계속 되고 있으며, 매일 스크립트의 첫 구절을 읽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N은 반복을 통해 새로운 것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다시 같은 구간을 반복하고 새소리가 나는 나무 클립의 앞 부분을 3프레임 잘라냈다. 새소리와 그 정체가 되는 버드나무의 등장에 대해 고민인 것 같다. 어제 늘린 3프레임은 다시 원래의 클립의 길이를 갖게 되었다.
자막이 타이프라이트 된다.
“당신에게라면 내 마음속의 비밀들을 모두 다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줌 더 타이트한 샷의 나무
“제발 내 마음의 지주가 되어 나를 격려해주세요”
하천 (가을)
가을 냇가의 모습이 페이드인. 아침에 자욱한 안개가 깔려있다.
“일요일부터 오늘까지 며칠 사이에 몇 년이 흐른 것 같은 느낌입니다”
이 말만큼 N의 심경을 대변하는 말도 없을 것이다. 그는 어제, 오늘의 어제, 내일의 어제를 살며 며칠을 하루처럼 살다가 갑자기 바뀐 한 주에 늘 당황한다. 스킵.
숨는다.
숨는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알고 싶을 거에요.
실은 아직 나도 잘 모릅니다.
“우리에겐 경험이 있으니 우리에게 배우렴”
N은 영상을 몇 번 되돌려 보았다. 그는 그가 편집한 시간들에 생각했다. 그리고 밀려있는, 산적한 시간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스킵. N은 어려운 시간, 나열하기 힘든 시간, 아직 잘 모르는 순간을 지나쳤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간다고 위안을 삼았다. 하지만 다시 내일. 어제의 지나친 시간을 꺼내어 보고 후회했다. 그 시간은 지나쳤다가 생각했지만 다시 돌아 왔다. 그때마다 누군가는 경험이라는 말로 해결하려고 했다.
아! 누군가 부르고 있는 것 같군요
아, 아 누군가 부르고 있는 것 같군요. 더 간절해 보이기 위한 방법에 골몰했다. 아 와 아의 타이밍 사이 슬픔 또는 아쉬움을 느끼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라고 생각하며 한 프레임씩 사이를 좁히거나 넓혔다. 아… 아. 누군가아- 부르고 이있는 것 같.군.요.
틀림없이 M일거에요.
스킵. 다시 스크립트.
아침부터 부산한 느낌이 듭니다. ‘M이 오랫동안 머물던 곳은 곧 허물어진다.’ 며칠 전부터 아버지께서 하시던 말씀이 다시금 떠오릅니다. 드드드- 드드드득 요상한 굉음은 온 집안을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아,아,아~’ 오랜만에 큰 목소리를 내봅니다. 요즘 M과 같이 떠나는 사람들이 늘었어요. 그때마다 들리는 이 굉음에 처음에는 혼란스러웠지만, 이제 큰 목소리를 낼 수 있어요. 가끔은 말로 하지 못했던 생각을 크게 말해도 아무 상관 없는 것 같아요. 벽 너머에 아버지와 엄마의 대화도 점점 커지고 있어요. 그래도 제가 잘 알아들을 순 없으니까요.
언젠가 우리도 M처럼 이곳을 떠나야 할지 몰라요. 몇 년 전 새벽부터 어딘가 다녀오신 두 분은 밤이 늦도록 불안한 모습을 보이시다가, 다음날 아침 ‘이제 이곳을 떠나야 할 지 모르겠다.’ 고 하셨어요. 나는 괜찮은데 말이에요. 왜 우리는 우리가 떠나야 할 때를 알지 못하다 급히 떠나야만 하는 걸까요? 아니면 우리는 무엇에 의해서 갑자기 떠나야만 하는 걸까요?
오후 9시, N의 집의 풍경이다. 그는 늦어버린 저녁식사를 고민한다. 형광등 무빙. “불을 켜요, 불을 켜요!”. 벨소리. 통화 중 입. 똑똑똑. 거실 풀샷. N과 W. 담배에 불을 붙이는 W. 에어컨을 켜는 W.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는 W. 삼분할.
자정, N의 집의 풍경이다. 구겨진 맥주 몇 캔, 유튜브를 통해 재생되고 있는 Haruomi Hosono의 Pacific, 별 이야기 없이 맥주를 홀짝이거나, 음악에 귀 기울이는 N과 W.
암전.
우리가 서 있는 이 뚜렷이 구분된 둥근 공간은 아직까지는 안전하지만 주위의 검은 먹구름이 점점 다가와 조여오는 위험으로부터 나를 격리시켜주는 이 원을 자꾸만 좁혀가고 있습니다.
음악.
여름의 대삼각형을 지나니 옆으로 들어가는 노란색 벽의 골목이 보였다. 그곳에는 한 뼘 정도 되는 작은 창문이 있었다. 창문이 있는 방은 세 평 남짓한 작은 공간이었고, 어떤 사람이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함께 있던 또 다른 여성은 커피를 마시며 잠시 사색에 잠겨 있는 듯했다. 방 안은 온통 연한 분홍색이었다.
“나를 읽어요….” 책을 읽던 사람은 책의 앞 장을 다시 살펴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때 동그란 공 하나가 내 발밑으로 굴러왔다. 분홍색 당구공이었다. 당구공을 집어 들자 창문은 사라지고, 갑자기 나타난 버스 운전기사는 누군가와 바쁘게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왼손에 달려 있어. 왼손. 공이 그래야 네가 원하는 대로 가.
물론 오른손도 중요하지. 오른손은 힘 조절이야.
당구 치는 것이 백 가지 방식이 있어. 우리 같은 초짜들은 공의 면적을 잘 계산해야 해.
내가 당구를 하고 싶어서 한 건 아니야. 우리 형님이 간경화셔서 아버지가 당구장을 차려주셨어. 그런데 형수님하고 계속 싸우는 거야. 시골로 내려간다고. 그럼 어차피 돈 들여 세운 거 내가 하겠다고 그랬지. 그때 월세가 37만 원이었어. 형한테 준 이자가 40만 원. 총 77만 원. 잊어버리지도 않아. 근데 한 번도 안 밀렸어.
지금도 내가 후회되는 게, 나는 결정권이 없어. 차남이라는 건 아버지가 안 된다 하면 끝나. 그런데 결혼하고부터는 우리 아버지가 나한테 뭐라고 하지 않아. 다만 돈을 엄마한테 빌리고 그래서 아버지한테는 면목이 없지. 나도 문제인 게 내가 판단하고 내가 해야 했는데, 그래서 지금은 남의 말을 잘 듣지 않아.
버스 운전기사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아이고, 앞차한테 미안해 죽겠네. 간격이 너무 벌어져 가지고. 뒤 차 삼 분 간격이네.
출근? 출근은 여덟 시 반. 퇴근은 열 시 반이야.
운전기사가 전화를 끊자 사라졌던 창문은 다시 나타났다. 나는 잠시 그가 한 말을 생각했다. 당구공은 손 안에 그대로 있었다. 여름밤은 여전히 아른거리는 빛이 가득한 채로 허공에서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작은 분홍색 방에서 책을 읽던 사람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다시 여름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종이로 만들어진 건물의 모서리를 따라 반짝거리는 은색 테두리가 천장까지 닿아 있었다. 때마침 커다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 때문인지 거대한 ‘여름밤’이 투명한 빛을 뿜는 것처럼 보였다. 여름밤 중간에 달린 푸른색 구슬은 전시장 입구의 복도까지 길게 늘어져 있었다. 사람들이 벽을 스쳐 지날 때마다 건물의 모서리는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공중에서 살짝 흔들렸다. 입구와 가까운 벽 한쪽에는 ‘여름밤’이라는 작품 제목이 투명한 아크릴 위에 작게 쓰여 있었다. 여름밤은 바닥으로부터 약간 떠 있었는데, 그 사이로 언뜻 동그란 빛이 보였다. 전시장 바닥 곳곳에 놓여 있는 여러 가지 색상의 작은 불빛들은 마치 밤하늘에 수놓아져 있는 별자리처럼 여름밤 안쪽에서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사람들은 여름밤 사이를 지나다니며 그 작은 불빛들과 만났다. 반짝이는 빛 주위로 영롱한 색상이 동그랗게 아른거렸다. 나는 그 빛 사이로 어렴풋이 내 어린 시절을 본 것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고개를 돌려보니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통로는 이제 거의 모든 방향으로 열려 있었다.
홀의 중간쯤 지나다 보면 천장에 달린 푸른 구슬 사이로 진한 자주색과 녹색의 두껍고 거대한 플라스틱 벽이 보였다. 통로의 옆, 혹은 막힌 부분에 놓인 서로 다른 색상의 거대한 플라스틱 판들은 기괴하지만 유려한 형상으로 사람들 사이에 놓여 있었다. 자주색과 녹색의 판 위에는 시간의 흐름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읽으며 밤이었던 낮과 낮이었던 밤을 알 수 있었다. 여름밤의 바깥에서도 중간에 놓여 있는 짙은 자주색과 녹색의 판들을 어슴프레하게 볼 수 있었다. 전시장에 비치된 안내문에 따르면, 거대한 여름밤 안에는 총 12개의 통로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벽 안쪽으로 이어져 있다고 했다. 그 통로는 열대 식물로 가득한 반구형의 공간과 연결되어 있었다. 온실의 조명은 식물 온도에 따라 색이 서서히 변했다. 천천히 붉어지는 노란 조명이 한낮인데도 저녁의 석양을 마주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온실을 걸어 나와 다른 통로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중앙 홀을 지나 들어간 곳은 작은 공원이었고 한 남자가 연인에게 이별을 말할 때 줄 선물을 신중히 고르고 있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천천히 잎사귀와 가지를 엮어 작은 화관을 하나 만들었다. 그리고 초록색 화관에 밀가루 반죽을 골고루 묻히고 기름에 곱게 튀겨냈다. 나는 이별 선물로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그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어 보였다. 이윽고 도착한 그의 연인은 예쁜 단발머리 여인이었다. 그가 밀가루 반죽을 노릇하게 튀긴 화관을 머리에 얹어주자 여인은 눈물을 흘리며 말없이 이별을 받아들였다. 남자는 조용히 연인을 안아주었다. 내가 낄 자리는 아니었지만 한 번 말을 건네 보려고 손을 뻗는 순간 잠에서 깼다. 머리 위에서 거대한 여름밤이 낮게 우웅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돌아다니느라 피곤했는지 그만 벽에 기댄 채 잠들어 버렸던 모양이었다. 짙은 자주색과 녹색의 플라스틱판은 열두 시간 마다 공중으로 떠올라 위치를 바꾸었다. 판들이 교차할 때 푸른 구슬은 천장에서 차례대로 내려왔고, 여름밤은 몇 초간의 완전한 정적 속에 머물렀다. 그 사이 사람들은 동그란 불빛 앞에 발걸음을 멈추었다가 사라졌다. 그들은 저마다의 기억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대부분 사라졌다가 금방 나타났지만 어떤 사람은 한참 후에야 다른 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여름밤은 그때 마다 특유의 낮은 소리를 냈다. 전시장 안에서 자신의 기억으로 들어가 꿈을 꾸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두 명의 사서를 통해 기록되었다. 한 명은 언제나 건물의 동쪽에, 다른 한 명은 서쪽에 서 있었다. 그들이 번갈아 휴식을 취할 때면 둥근 창 너머로 눈이 하얗게 쌓인 바다가 미동도 하지 않은 채로 멈춰 있었다. 그 작은 풍경은 마치 그림 같아서 많은 이들이 전시 작품의 일부로 착각했지만, 그들이 휴식을 끝내고 건물의 동쪽과 서쪽으로 움직이면 파도는 다시 눈부시도록 하얗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꿈은 영화처럼 건물 천장 위로 떠올랐다 사라지기도 했다. 사랑에 관한 꿈은 자주색과 녹색 판 위에도 잠시 나타났는데 그때 마다 사서의 얼굴 위에는 말없는 미소가 번졌다. 꿈의 기록을 맡는 사서는 전통적으로 목소리가 없는 이들이었다. 그들의 언어는 이미지였으며 사람들은 여름밤 안에서 가장 조용한 피조물인 그들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나는 동쪽 사서의 투명한 눈동자와 마주치자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지나쳤다. 그는 이미 나를 알고 있다는 듯 빙그레 웃어 보였다. 내가 찾던 네 번째 통로는 여름밤의 가장자리에 있었다.
통로로 들어가려는데 마침 등산복을 입은 사람이 마주 오다가 손을 내저으며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 그는 걸어오느라 힘들었는지 아무것도 없다며 가쁜 숨을 내쉬며 이야기 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래도 들어가 보기로 했다. 길은 가면 갈수록 좁고 어두워졌다. 골목의 끝에 다다르자 아까 만났던 행인의 말과는 달리 오래된 배 한 척이 보였다. 한 사람이 간신히 지나갈 만한 틈으로 빠져 나와 보니 눈부신 하얀 모래 위에 선미 쪽이 거의 부서진 채로 낡은 배가 놓여 있었다. 모래 위에는 동전이 떨어져 있었다. 1973년도 100원짜리 동전이었다. 실제보다 가볍고 생김새도 조금 달라서 누가 만든 동전 같았다. 주변에 바다가 있는 지 둘러보았지만 하얀 모래사장뿐이었다. 어디선가 따뜻한 바람이 불었고 나는 그때 머리칼이 녹색으로 변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미용실의 헤어 디자이너는 본래 녹색이 물이 잘 빠지는데 그것도 자연스러워 보인다며 만족해 했다. 드레드 머리를 지푸라기로 엮어 멋을 부린 사람이 내 옆을 지나갔고 나는 무심결에 그를 따라갔다.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처음에 들어왔던 전시장의 입구가 어디였을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길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석양이 주황색으로 온 하늘을 물들이고 길은 조금씩 어두워졌다. 나는 다시 여름밤으로 돌아가기 위해 길을 따라 달렸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길은 끝이 없었고 오르막길은 점점 높아져 갔다. 한쪽에는 열대우림이 초록으로 무성했다.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 순간 공중에서 진한 자주색과 초록색의 빛나는 판이 서서히 만나는 것이 보였다. 사방에 정적이 흘렀다. 나는 여름밤 안에 있었다. 그곳은 노을빛으로 가득했던 반구형의 온실이었다. 숨차게 달려온 길을 돌아보니 보라색 선이 땅 위에 길게 남아 있었다. 선은 점점 흐릿해져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미세한 보라색의 입자들은 바람을 타고 건물의 모서리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은빛의 테두리는 이내 연회색의 대리석 무늬로 바뀌었다. 반구형의 벽을 따라 설계된 오르막길을 천천히 돌아나오면 출구가 보였다. 그 하나뿐인 출구를 나오면 다시는 여름밤을 볼 수 없었다.
작가가 작품을 지어가는 중에, 그리고 다 지은 후에 나눈 몇몇 대화작품을 이해하는 단서 혹은 작품을 비틀어볼 갈피
임나래
작품 전반에 흐르는 ‘평범한 것, 비슷한 것, 닮은 것 ↔ 반듯한 것, 편평한 것, 단정한 것’을 오가는 형상에 대한 이야기가 “사람 사는 곳이 다 비슷비슷하기도 했고,” “그가 살고 있는 곳의 풍경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부분과 연결되네요. 그가 사는 모습이나 내가 사는 모습이, 혹은 그 누군가 사는 모습이나 사는 게 다 그렇지 이런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작가님이 하고 싶은 말이 “사는 게 다 그렇지” 같은 맥 빠지는 메시지는 아닐 거로 생각하는데요.
일정하고 단순한 기준에 의해 일을 하는 그, 그로 인해 ‘쌓아올려진 것’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결과에 대한 묘사로 그의 내면을 드러내는 부분이 때로는 작가의
독백처럼 다가오기도 해요. 본문을 시작하는 첫 두 문장이 형상 묘사가 아닌 성질, 느낌, 감정을 건드리는 것이어서 그런 걸까요? 객관적인 묘사를 하는 듯한 단어들이 객관적인 묘사를 위해 필연적으로 선택된 것 같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선택이 매우 의식적으로 다가와요. 쌓아 올릴 것을 매우 신중하게 선택하는 그와 글감을 매우 신중하게 선택하는 작가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그가 일을 하는 과정이 자연스레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따라가는 인상을 주네요.
조건을 보면 논리적으로 정합성을 띤 것 같지만, 결과물은 그렇지 않은. 과정이 고요하고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반복되지만, 어느 순간 와르르 무너질 것 같은 규칙이 만들어내는 불안감. 평이함이 만들어내는 긴장감. 뭐 그런 야릇한 어긋남이 상상된다고 할까요.
현재 문단의 순서대로 차례로 써나가면서 살을 붙였는지 궁금하네요. 아니면 탈고 직전에 순서가 처음 계획과는 달리 완전히 달라진 문단이나 문장이 있나요?
강지윤
불안감을 감지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을 생각했던 것 같아요. 개인인 사람들은 주어진 상황에서 충실히/성실히 살아가는데 만들어내는 것들이 결국 부조리한 것들로 치닫는 거죠. 근데 그걸 사람들이 모르진 않아요. 알고 있지만 (나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는 마음과 그것에 더해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에 안도하는 마음이 둘 다 존재해요. 좀 슬프긴 한데, 저는 정말 육십 살쯤 먹어서 병에 걸리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거든요. 그런데 그게 또 제 주변에 있는 친구들을 봐도 이게 저 혼자만의 문제는 아닌 거라는 거죠.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아, 이대로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그런 안도감이 드는데 우스웠어요. “사는 게 다 그렇지”라는 말은 맥 빠지지만 그 말을 뒤에 감추고 만들어내는 삶의 풍경(군상이 아니라)을 그리고 싶었어요.
아무래도 그와 글을 쓰는 작가로서의 나, 모티브가 되었던 설치 작가로서의 나와 (최소한 제 안에서는) 동일시 되는 인물이기 때문에 제가 실제 설치 작업을 할 때와 비슷한 마음으로 그가 일을 하고, 또 제가 글을 썼어요. 시간이 흐르고, 무언가가 잘 쌓아 올려지고 그래서 ‘자라났다’는 것이 꼭 긍정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이것은 제 지난 작업 (완성은 못했지만) 담쟁이가 자라면서 그 뒤에 있던 텍스트를 가리는 벽이 되어버리는 - 그 작업에서 연속된 생각입니다.
“그가 쌓아올린 것은 평범하고 무료한 것들이었다.” 이것이 애초의 첫 번째 문장으로 설정되었습니다. 그냥 떠올랐어요. 계속 머릿속으로 그 광경을 그리다 보니 그런 것 같아요. 그리고 줌 아웃 된 풍경이 ‘기울어져있는 것’도 애초에 설정되어 있던 거고요. (이것은 제 지난 작업 계획 중 ‘기울어진 벽’에서 연상된 것입니다. 실제 본문에도 들어가 있고요.) 마지막 문장인 “대부분 그런 상태로 유지된다”는 것도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 맨 뒤에 남게 될지는 몰랐지만요. 중간에 캡션의 형태로 삽입되는 부분은 거의 마지막에 결정되었습니다.
저를 아는 사람들은 대번에 이것이 제가 작업하는 것을 떠올릴 수 있도록, 하지만 모르는 사람들은 전혀 느낄 수 없는 이야기처럼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노동자이든 예술가이든 다를 바는 없으니까요. 예술가이지만 노동하는 사람에 대한 이미지는 늘 가지고 있었습니다.
임나래
작가 N의 세계, 〈보다〉의 세계, 인물 보다가 향하는 어떤 다른 세계가 지면의 문자와 스크립트, 인용 등의 형태로 시각화되는 것이 재미있네요. 〈보다〉의 마지막에 나오는 스크립트, “은신처라는 곳이 어딘지, 그 행선지는 아직 모르지만, 우리가 어떤 곳에 정착했는지 알려주고 싶다”는 내용에 이어 그 어떤 곳을 보여주는 작품이 〈내일의 어제, N.〉에서 조금 엿보이는 것인가 (하지만, 완성되지 못하고 실패하니 그 세계가 완전히 드러난 것은 아니겠지요?) 싶기도 하고요.
앞선 미팅에서 이번 작품이 〈보다〉의 주인공이 향하는 다른 장소, 어떤 기이한 장소 또는 공간, 혹은 작가님이 겪고 있는 세계를 은유한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스토리라고 설명하셨는데요, ‘시간과 공간의 중첩, 반복, 끼어들기, 엉킴’ 등의 모습으로 작품을 이해한다면 어느 정도 작가님의 의도와 맞아 떨어지는지요?
작품에 홈쇼핑, 컴퓨터와 같은 주요한 소재가 등장하지요, 컴퓨터라는 특정한 물건 자체가 중요하다기 보다 어떤 사물을 원하고, 구매하고, 방치 또는 사용하다 교체하는 일련의 행동과 시간들을 작품에서 보여주려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어요. 이번 작품과 관련해서 ‘홈쇼핑, 컴퓨터, 소비’와 같은 키워드에 대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이희인
N이 편집하고 있는 상황은 〈보다〉를 재편집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그 시간은 보시다시피 반복에 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재현을 위한 체계에 갇혀 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글 속에 제시되는 음악, 그리고 N이 편집을 위해 바라보는 스크립트와 모니터, 베란다 창문이라는 3개의 스크린이 이번 작업을 구성하는 세계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그 사이에서 ‘중첩, 반복, 끼어들기, 엉킴’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겠지요.
홈쇼핑이나 컴퓨터 보다는 어떤 소비를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가령 “최근에 구입한 70년대 바이닐들, 그리고 카세트들, 스피커에선 스트리밍으로 재생되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부분 같은 경우가 소비의 예라고 하겠습니다. 자본주의 시대에 생산과 소비의 주체이던 인간이 생산의 자동화에 따라서 생산의 주체에서 탈락하게 되지만, 자본주의 시대의 연장을 위해서 소비의 주체로만 기능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최근에 소비의 행태도 과거의 물질의 소비에서 비물질적 소비로 변모하고 있는데, 만약 인간이 소비의 주체로만 기능하는 시대에는 어떻게 변해 있을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 과잉의 시대를 과거 일본의 버블경제 시대를 통해 생각해 보려 했습니다. 그 중에서 시티팝이라는 음악 장르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 장르는 90년대에 우리나라에서도 선보인 적이 있습니다. 재미있게도 최근 다시 조명을 받고 있는데, 이것이 장르 음악이 갖는 유행의 순환인지 아니면 소위 힙스터들이 찾은 도피처인지는 모르겠으나,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넘침의 시대의 음악을 지금의 젊은이들이 듣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흥미로웠습니다.
임나래
작품의 서두에 (〈READ ME〉와 버스기사 에피소드가 들어가고, 여름밤 안에 관람객인지 혹은 행인인지 모를 캐릭터가 등장하는 등 작품의 내용이 초고보다 풍부해졌네요.
작가님이 익히 설명하셨던, 꿈에서 비롯된 어떤 사건, 이미지, 인물들이 〈REAM ME〉라는 이전 작업과 함께 이어지며 시작하는 구조가 흥미로웠어요. 〈READ ME〉 작업을 본 사람이든 아니든, “세 평 남짓한 작은 방 안에서” 공간이 전환되며 동선이 출발하는 것이요.
두 번째 에피소드라고 할 수 있는 버스기사의 이야기는 작품에서 어떤 역할 혹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요? 이별화관을 만드는 연인의 에피소드 역시 어떤 의미가 있나요?
작품 전체에서 빛이 담당하는 역할이 크네요. 창문으로 빛이 들어오는 “온통 연한 분홍색”의 방, “빛이 가득한 채로 허공에서 흔들리는” 여름밤, “반짝거리는 은색 테두리” 등등. 색이라는 것도 결국 빛의 파장이고요. 조명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석양이나 밤이라는 배경도 사람이 자연스레 감각하는 빛의 변화이자 시간의 변화이고요. 둥근 모양의 사물이나 구조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런 반/구형의 구조가 빛을 만나서 작품이 전체적으로 꿈처럼 시작과 끝이 모호하고, 정확한 거리와 깊이를 잴 수 없는 듯한 이미지를 만드는 것 같아요. 전체가 하나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무관한 듯 보이는, 상호개연성이 밀접하지 않은 에피소드의 배치가 꿈을 닮았다는 느낌도 들고요.
정두이
원래 〈READ ME〉로 시작하는 설정은 아니었는데 여러 번의 수정과 고민 끝에 그 문단이 앞으로 나오게 되었어요. 이번 여름밤 작품도 하나의 전시로 생각하고 진행하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READ ME〉와의 연결고리를 만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인스턴트 루프의 공간도 통로 중의 하나라고 (마치 거울을 보듯 내 편에서 인스턴트 루프를 바라보는) 글에 직접적으로 들어갔는데 보다 간접적으로 보여지면서 첫 문단으로 옮겨졌고요, 〈READ ME〉 이후에 ‘나’는 여름밤으로 ‘다시’ 들어갑니다.
버스 운전기사 이야기는 〈READ ME〉전시를 구성할 즈음에 버스를 타고 가다 제가 실제로 들었던 이야기였어요. 그 대화에서 연상되는 개인의 삶에 관한 이미지가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서 어떤 형태로든 작업을 해봐야겠다 생각했던 이야기입니다. 원래 〈READ ME〉 안에 거울과 함께 보여주고 싶었는데 스토리상 복잡해질 것 같아 넣지 않았어요. 여름밤 안에서는 〈READ ME〉 파트의 일부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별화관 이야기는 제가 그 날 꾼 꿈입니다. 꿈이라고 하기엔 생생해서 일어난 후 여름밤에 옮겨 적었습니다.
자주색 초록색 판과 푸른 구슬.
제가 모두 좋아하는 색깔들인데, 반짝이는 은색 테두리로 장식된 종이로 된 건물 안에 색의 덩어리들이 리듬감 있게 움직이는 것을 상상했습니다. 마치 악보 안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전 가끔 추상화를 보면 그 안으로 들어가는 상상을 해요. 캔버스 안에서 이것저것 구경하다 밖으로 나오곤 하는데, 그래서 동그라미나 선이나 형태적인 측면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부채꼴이나 원형, 온실도 좋아하고 열대 우림도, 석양도 제가 좋아하는 것들만 모아놓은 여름밤의 출구입니다.
《현재전시》전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전시에서 기대하는 전통적인 형태의 작품들이 선보이지 않는다. 런던 헤이워즈 갤러리에서 《보이지 않는 전시》라는 제목으로 앤디 워홀, 요코 오노를 포함하여 예술가들의 작품들이 전시되었는데, 그 중 한 작품이 백지에 프레임을 하여 전시실의 사방 벽에 걸어놓은 것이었다. 백지인 작품에서 관객들은 무엇을 보았을까? 우리의 눈에 선과 색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정말로 우리가 ‘아무 것도’ 보지 않는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일까?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관객들은 아마도 각각의 작품에서 다른 감정, 다른 생각, 다른 경험들을 했을 것이다. 비가시성과 텅 빔이 오히려 개인의 인식의 범위나 상상의 영역에 따라 경험의 폭을 더 넓힐 수도 있다. 동일한 작품도 보는 사람에 따라 무엇을 보고 생각하는 지 다르기 마련이다. 얼마 전 작가 제니스 정의 《흔적》전에서 일부분이 실로 표현된 작품들이 전시되었었다. 이 작품을 본 한 관객은 바느질을 여성의 일로 결부시켰지만 이는 작가의 의도와는 다른 것이었고 여성성과도 별개의 것이었다. 이처럼 작가의 의도를 벗어나 관객이 가지고 있는 인식의 범위에 따라 작품의 의미는 확장될 수 있다.
《현재전시》전 역시 관객들에게 새로운 방식으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글로 표현된 작품이나 글을 동반한 작품들이 이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현재전시》전에서 강지윤, 이희인, 정두이 작가는 시각적으로 먼저 전달되는 형태가 아닌 글의 형태로 작품들을 보여준다. 글로 보여주는 것이라면 언뜻 작가의 유형의 작품을 글로 묘사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단지 작품을 묘사하는 글이었다면 새로운 형태의 전시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전시에서 회화, 조각, 사진, 비디오 아트 등의 형태로 미술 작품들을 만나게 된다. 이러한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 작품을 보여주는 새로운 시도로서 《현재전시》가 계획되었다고 기획자는 말한다. 회화나 조각, 사진 등의 작품들은 우리가 사색적 유희를 즐기기에 앞서 한 순간에 우리의 눈을 먼저 사로잡는다. 반면 《현재전시》전의 작품들은 한 작품을 보는데 만도 상대적으로 더 많은 시간을 요하고, 작품을 끝까지 읽어야 하는 적극적인 행동이 요구된다.
이른바 예술과 관련된 전문가들을 제외하면 미술 작품은 어렵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지인과 함께 회화 전시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 역시 현대 미술은 어렵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마다 작가가 무엇을 말하는지 그 의미를 찾고 분석하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은 잘 모르기 때문에 현대 미술은 어렵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물론 이해하기 난해한 작품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작품에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고 더욱이 추상성이 강조되는 현대 미술 작품에서는 난해함이 한층 더할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미술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무엇을 알아야만 하는 것인가? 한 작품을 보기 위해 많은 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면 차라리 피하고 말 것이다. 물론 미술과 관련하여 지식이 풍부하다면 작품을 좀 더 잘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작품을 보는 데에 그리 많은 것이 필요하지는 않다. 자신에게 어떤 작품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지 알아차리고 시각적, 정서적, 사색적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은 참으로 힘겨운 일이다. 이러한 일상을 지속하기 위해 환상이 필요하다. 환상은 고통으로부터 거리 두기이며 고통스러운 현실을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장치이다. 마치 얼굴에 세차게 부딪치는 폭우를 맞으며 걸어가는 대신 창문을 통해 내리는 비를 바라본다면 그 풍경이 어느 정도 낭만적으로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정두이 작가의 〈여름밤〉은 우리를 이 환상의 창으로 불러들인다. 분홍색 당구공을 집어 들며 창을 통해 우리는 여름밤 안으로 들어간다. 한 공간이지만 서로 다른 작은 공간들, 서로 다른 이야기들,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게 하는 연결된 통로들, 이 공간을 가득 채우는 반짝이고 영롱한 빛, 그리고 아름다운 색채들. 회화라면 한 폭의 추상화를 보는 듯하다. 작품이 전하는 이야기에 빠져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잠에서 깨거나 어느 순간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고 있다. 여름밤은 우리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꿈의 공간인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을 한 순간 경험하고 꿈에서 깨어나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여름밤을 나와 현실로 돌아온다. 정두이 작가의 작품들은 관객들을 작품 속으로 깊숙이 끌어들인다. 하지만 작가는 관객들이 작품 속으로 들어와 꿈을 꾸고 온전히 현실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따라서 우리는 〈여름밤〉 안에서 각자의 꿈 같은 아름다운 경험을 하고 그것을 기억 속에 묻고 멀쩡히 현실로 복귀해야 한다.
강지윤 작가는 그 동안 관계성에 주목한 작품들을 해왔다. 작가의 이 전 작품들의 제목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오래된 유대 관계가 있었다〉, 〈여지가 있는 대화〉, 〈사이의 대화〉, 〈적당한 사이〉, 〈채우고 흩어지는 사이〉, 〈아무일도 아닐 수 있습니다〉 등. 그 중 〈아무일도 아닐 수 있습니다〉는 1, 2, 3, 4 단계로, 관계의 흐름을 보여주는 문구가 적힌 사면으로 접힌 한 장의 핑크 빛 책자가 구조물 위에 놓여 있는 작품으로 아주 인상적이다. 이 작품과 마찬가지로 글을 이용한 작품들이 많고 ‘말과 글’은 작가에게 중요한 작업의 재료로 사용되고 있다. 말과 글은 우리가 평소에 늘 접하고 사용하는 것이어서 작품이 좀 더 편안하고 친숙하게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모든 관계는 양가성을 갖는다. 동일함 속에 차이가 있고 이 차이는 다시 동질성으로 환원된다. 이 순환 속에서 우리는 언제나 긴장하고 갈등하며 관계의 균형과 불균형 사이에서 시소 게임을 한다. 그 사이에서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는데 불안은 반복되는 행위를 통해 어느 정도 해소된다. 쉽게 말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우리가 어느 정도 안정감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작가는 이전의 작품들은 차이에 집중해 작업을 했고 이번 작품에서는 동질성에 집중했다고 말한다. 작가의 이러한 의도가 작품에서도 잘 드러난다. 〈년도미상〉에서 성실한 노동자인 그는 편평하고 반듯한 것들을 모아 쌓아내는 일에 온 신경을 쏟아내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 일을 계속 할 수 있다. 다만 그가 오랜 시간 공들여, 신중하게 고른 것들을 단정하게, 모서리를 맞추어, 신경을 써서 쌓아 올린 것들이 이상하게 ‘기울어져’ 있다. 기울어져 있음이 불안을 야기하지만 모두가 똑같이 기울어져 있다는 동질감에서 평온함을 얻고 작업자들은 같은 일을 반복하며 평범한 일상을 지속해 나간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같음과 다름 사이를 오가며 균형을 이루고자 하는 노력이 계속될 것이다.
회의라는 단어가 이희인 작가의 여러 작품들을 관통한다. 인간성 또는 작업에 대한 작가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과정이 작품으로 이어진 듯하다. 작가는 작품을 과정 중에 생긴 부산물 혹은 잉여쯤으로 생각하여 ‘날림’이라는 부제를 달았지만 목적성을 지닌 결과물이 아니어도 작품이 되기에 충분해 보인다. 작품들 속에서 문명화 된(기계화 된)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인간성을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능동적인 주체로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작가의 회의적인 시각이 엿보인다. 〈내일의 어제〉에서 N은 물질이 넘쳐나는 소비사회에 반감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은 사람들의 소비 행태에 휩쓸리지 않고 합리적인 소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작가가 곧 N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작품들을 보면 작가의 생각이 작품에 녹아있다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내일의 어제〉는 〈보다〉(2016년 영상 작품)를 편집하는 N의 반복되는 일상을 보여준다. 반복되는 시간, 지나간 시간, 어제, 오늘의 어제, 내일의 어제. 며칠을 하루처럼 살다가 바뀌어 버린 당황스런 한 주. 그리고 이런 시간들의 반복. 이미 과거가 되어 버린 시간은 지금,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다. 상실감과 무력감만 남을 뿐이다. 그래서 N은 식물 같은 존재일 수 밖에 없다. 이는 흘려버린 시간에 대해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후회 또는 죄책감과 같은 것이다. 작가 역시 작품 활동 중에 그리고 일상의 삶에서 오는 무력감을 표현해 낸 것이 아닌가 한다.
작품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인데 필자 역시 주관적인 평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무엇보다 《현재전시》전은 시간과 장소의 제약이 없는 만큼 많은 사람들이 작품을 감상하며 즐거운 경험을 하길 기대한다.
© 2017 에이페이지, Printed in 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