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실 이 글은 『현재전시 #01』에 대한 (메타) 비평으로, 『현재전시 #01』는 책 안에서 《현재전시》로 지칭되는데, 이는 이 출판이 한편으로 ‘미래의 현재’를 가정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 전시를 출판으로 대체하고 이를 전시 읽기로 전유하는 방식이 이 출판의 고유한 하나의 방식이자 실험이며 향후 지속되는 하나의 틀로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아마도 전시의 해체를 통해 출판을 해체하(려)는 이 출판의 의도 아래, 이후 이 출판(『현재전시 #01』)을 그리고 이 출판의 개념까지를 《현재전시》로 명명하기로 한다―따라서 이 글은 사실 《현재전시》에 대한 (메타) 비평이다. 이 표면상의 출판, 《현재전시》는 스스로 전시임을 가장/가정한다. 이는 전시이기도 하고 출판이기도 하며(‘전시/출판’), 또 전시와 출판 사이의 간극을 시험하며 전시와 출판을 접합한다(‘전시-출판’). 나아가 출판으로부터 새로운 전시의 가능성을 다시 끌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출판-전시’). 이후 《현재전시》는 ‘전시/출판’에서 ‘전시-출판’으로, 다시 ‘출판-전시’로 계속해서 그 명명을 달리하게 될 것이다. 물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는 결과적으로 출판의 형식을 띠고 있으며, 이 안에 들은 개별 글들은 작업이 아닌 글로서 규정했다, ‘「」’ 표시를 통해서. 세 명의 시각예술 작가의 작업이 곧 글로 치환되는 과정의 위상에서 그 작업-글들을 검토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이 작업-글에 대한 각주들은 책을 대하는 글의 문법을 체현한다. 거꾸로 그러한 글의 문법을 체현하기 위해서 이 작업-글들 역시 글로서 지정하고자 했다.

2) 
‌랑시에르는 이미지의 직접적 현전의 가능성을 괄호 치고, 이미지와 그것의 전달에 간극을 삽입함으로써 이미지의 유동적 해석 가능성을 제시한다. “새로운 체제, 즉 19세기에 구성된 예술의 미학적 체제에서 이미지는 더 이상 어떤 사유나 감정의 코드화된 표현이 아니다. 이미지는 더 이상 복사본double이나 번역이 아니다. 이미지는 사물 자체가 말하고 침묵하는 방식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미지는 무언의 말[하기]로서 사물의 한복판에 거주한다.”(자크 랑시에르, 『이미지의 운명』, 김상운 옮김, 현실문화, 2014, p.30.) 영화의 몽타주를 가지고 예를 드는 랑시에르의 ‘문장-이미지’라는 개념은, 텍스트와 이미지의 선후 관계를 뒤엎고, 그 둘의 연쇄 관계를 만든다. “문장은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이미지는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문장-이미지라는 용어로 내가 의도하는 것은 미학적으로 정의되어야 하는 두 기능들, 즉 텍스트와 이미지 사이의 재현적 관계를 깨뜨리는 방식에 의해 정의되어야 하는 두 기능들의 결합이다. 재현의 도식에서 텍스트의 몫은 행위들의 이념적 연쇄의 몫이며, 이미지의 몫은 텍스트에 살[육신]과 일관성consistance을 부여하는 현전의 보충이었다. [그러나] 문장-이미지는 이 논리를 뒤엎는다.”(Ibid., p.86.)

3) 
여기서 ‘간극’은 이미지와 언어의 ‘분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지와 언어의 어떤 친밀한 접합에 가까울 것이다. “만일 사물이 보이는 사물과 말해지는 사물로 분리되어 있다면, 말은 그 분리를 없애는 데에, 그것을 보다 뿌리 깊은 것으로 만드는 데에, 그것이 말하도록 그대로 내버려 두는 데에, 그것 속에서 사라져 가는 데에 착수한다. 그러나 말이 작동해서 만들어 내는 그 분리는 여전히 말 속에서의 분리일 뿐이다. 아니면, 그 분리로 인해, 말이, 이미 그 분리 속에 들어가 있는 하나의 말을 통해 말하는 말이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현전의 단순성, 현전 가운데에서의 보이는 것과 말하여지는 것의 단순성 자체인 단순성으로 인해. / 현전은 다만 분리 속에 있지 않다. 현전은 분리 한가운데로 또 다시 도래하는 바로 그것이다.”(모리스 블랑쇼, 『기다림 망각』, 박준상 옮김, 그린비, 2009, p.122.)

4) 
‌작품과 번역은 벤야민의 사상에서 유비가 아닌, 근친적(verwandt) 관계를 이룬다. “번역은 하나의 형식이다. 번역을 그 자체로서 파악하려면 원작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원작 속에 그 번역의 법칙이 그 원작의 번역 가능성(Übersetzbarkeit)을 통해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발터 벤야민, 「번역자의 과제」,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 번역자의 과제 외』, 최성만 옮김, 도서출판 길, 2008, p122.), 번역은 원작으로부터 원작과의 친연적 관계를 만드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삶의 언표들이 살아 있는 자에게 무언가를 의미함 없이 그 살아 있는 자와 내밀하게 연관되는 것처럼 번역은 원작에서 나온다. 그것도 원작의 삶에서라기보다 원작의 ‘사후의 삶’(Überleben)에서 나온다.”(Ibid., p.124.)

5) 
‌가령 우리는 ‘책으로서의 인터페이스를 대입하는 전시’를 생각해볼 수 있다. 정가영 국립현대미술관 큐레이터의 전시에 대한 그의 독특한 시뮬레이션 감각, 잡지의 레이아웃 속 텍스트-이미지의 배치를 가정하고 전시를 구성하고 이후 다시 출판으로 이를 구현하는 과정을 그 예로 들 수 있겠다. 국립현대미술관(2017.12.12.)에서 열린 ‘큐레토리얼 실천과 출판’이라는 자리에서 패널로 참여한, 정가영의 경우, 전시보다 잡지를 만드는 경험이 선행되었는데, 이후 그가 참여한 전시에 대한 경험에서 건축 잡지에서의 이미지와 텍스트의 배치가 어떻게 전시 공간에서의 배치에 대한 관점과 맞물리는지, 나아가 전시의 배치가 어떻게 잡지의 레이아웃과 차별화되는지(‘도면으로 들어오지 않는 전시’)를 살펴볼 수 있었다. 거꾸로 ‘전시로서의 인터페이스를 대입하는 책’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이는 증강현실로 연장되는 책이라는 근래의 책의 즉자적인 공간 구현의 방식보다는 구체시와 같은 책의 페이지에서 아이디어를 감지할 수 있는데, 더 전통적인 방식으로는 병풍 혹은 두루마기 그림 등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전시》는 기존 전시의 대체제로서 존재하고자 하는 것처럼, 또한 기존 출판의 대체재로서 존재하고자 한다. 이로써 전시의 외부와 출판의 외부가 맞물리는 지점을 상정하고자 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후 본문에서 더 이야기된다.

6) 
‌웹 환경 내에서 글쓰기는 대안적 지침을 준다. “…디지털 텍스트는 텍스트의 개별적 독서와 디지털화된 거대한 망들 속에서 하이퍼텍스트를 통하여 팽창된다. … 음성 언어, 문자 언어, 이미지를 혼합시키는 하이퍼텍스트는 선형적 텍스트와 대립되는 것으로, 망으로서 구조화된 텍스트이다. 하이퍼텍스트는 다발의 망들과 이 같은 망들 사이의 관계―참조, 주석, 지시소, 버튼 등―로 이루어진다.”(김성도, 『디지털 언어와 인문학의 변형』, 경성대학교 출판부, 2003, p.71) 하지만 《현재전시》는 앞서 언급했듯 전시의 대체재로서 기존 전시와 유비 관계를 이루며, 전시의 물리적이고 (시)공간적인 측면을 상정하고 있다.

7) 
‌표지의 “《현재전시》는 동시대 시각예술의 지면 플랫폼입니다.…”로 시작하는 「자세히 보기(information)」는, 따라서 본문에 위치하는 하나의 글로서, 다만 페이지를 명기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념적으로) 오류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곧 책의 페이지가 아닌 책의 이미지라는 것을 고수한다는 점에서. 다른 한편, 표지 좌측 상단에 있는 창의 축소‧확대‧소멸의 나란히 위치한 세 아이콘은, 이 출판이 현재 웹으로 연동되지는 않지만, (향후) 하이퍼링크적 접속의 역량을 가지는 것을 의도한다고도 보인다. 이를 웹상에서 본격적으로 일종의 본문이 전개되기 전에 뜨는 공지 성격의 팝업창을 의미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이 표지를 하나의 이미지로 볼 수 있는 당위가 주어진다고 하겠다―그것은 별도의 창으로서 본문의 페이지를 이루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꺼야/지나쳐야 본문에 이르게 된다.

‌8) 
‌결과적으로, 이미지/글, 미술/문학, 전시/출판의 세 개념 쌍을 낳고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현재전시》는, 전자에서 후자로의 변환 과정이 아닌, 후자로부터 전자의 개념을 재고하게 하는 실험을 직접적으로 수행한다는 점에서, 그 활동의 지속 가능성 이전에 예술(계)에 질문을 던지는 측면에서 의미를 달성한다.